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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타이완의 초대 총통이었던 장개석 기념관

 

장기간 동안 개인 여행을 하다 보면 시간과 날짜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시차가 있는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여행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난 평소엔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시계를 차고다니지 않지만, 해외 여행을 할 경우에는 시간과 날짜가 숫자로 표시되고 얼람(alarm) 기능까지 있는 전자 손목 시계를 늘 차고 다닌다. 결벽증도 좀 있는 편이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심적으로 편안한 여행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호텔에 wake-up call을 부탁해 놓고서도 항상 두개 정도의 얼람시계를 켜놓고 잔다. 실제로 동남아국가에서는 wake-up call을 부탁해 놓았는데도 아침에 직원이 깜빡 잊어버렸다고 'Sorry.'하고 그만인 숙소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2010년 10월말)에도 타이완, 태국, 라오스 3개국을 한달 동안 여행하는 장기간의 일정이었기 때문에 난 인천공항을 이륙할 때부터 전자 손목 시계를 찬 채로 비행기에 탑승했었다. 그때는 이 시계로 인해 내 여행에 작은 차질이 빚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타이완의 타오위안(Taoyuan) 국제공항에 도착한 후, 타이페이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공항 터미날을 막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평소에 좀처럼 차지 않던 손목 시계를 찬 채로 두시간 가까이 비행하다 보니, 손목을 꽉 조인 시계끈이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그래서 시계끈을 좀 느슨하게 매려는 순간, 내 시계는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와서 공항 터미날 바닥에 쿵소리를 내며 떨어져버렸다. 순간의 부주의로 시계를 손에서 놓쳐버린 것이다. 충격이 꽤 컸었는지 시계줄은 산산이 부서져서 부품들이 터미날 바닥 여기저기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첫 방문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니 난감했다. 호텔도 예약하지 않고 온 상태인데, 숙소를 구하고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처음 방문한 낯선 도시에서 시계 수리점부터
찾아 헤맬 생각을 하니 심리적 부담감이 작지 않았다. 까짓것 최악의 경우에는 새로 쌈지막한 시계를 하나 구입하면 될터이니 따지고 보면 그다지 큰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여행 처음부터 이런 일이 생기니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타이페이 시내에 들어가면 시계를 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 난 여기저기 흩어진
부품들을 줏어서 여행 가방 속에 잘 보관한 후, 타이페이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종점인 타이페이 본역(Taipei main staition) 앞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큰 캐리어를 끌고 숙소나 시계 수리점을 찾아나설 수도 없는 일이어서 일단 근처에 있는 큰 백화점에 들어가 비를 피하기로 했다.

 

Shinkong Mitsukoshi(新光三越) 백화점은 타이완 본역 근처에서는 가장 크고 유명한 백화점이다. 우리들 상식으로는 이런 백화점에서 싸구려 전자 손목시계를 수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비도 일단 피해야 했고 딱히 다른 일을 할 마음도 내키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백화점 안내원에게 이곳에서 시계를 수리해 주는 곳이 있냐고 문의해보니까 백화점 안에 두곳의 시계점이 있으니 직접 가서 알아보라고 한다.

 

첫번째로 들른 곳은 백화점 안에 입점해있는 카시오 대리점이었는데, 역시나 자사 제품이 아니면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한곳은 특정 브랜드의 대리점이 아니라 여러 브랜드의 시계들을 모두 취급하는 시계점이었는데, 가보니 젊은 여직원 한명이 혼자서 손님과 상담 중이었다. 젊은 아가씨가 시계를 수리할 줄 알 것 같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녀가 손님과의 상담이 끝나기를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큰 캐리어를 끌고있는 나의 행색이 외국인 관광객이라고 생각됐는지, 그 아가씨는 손님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뒤 내게 오더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영어로 묻는다. 나는 주머니에서 시계 부품들을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고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부품들을 살펴보더니, 뜻밖에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서는 다시 상담중이었던 손님에게로 갔다. 잠시후 그 손님이 시계를 구입하고 떠난 뒤, 그녀는 다시 내게 돌아오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시계의 부품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시계를 어느 정도 만졌을 때, 나는 순간 속으로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리비가 얼마나 드는지 미처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경우,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바가지를 왕창 쓰기 십상이라는 걸 난 경험적으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약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고가의 샘소나이트 여행가방을 잠궈놓은 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시내의 샘소나이트 대리점까지 갖고 가는게 귀찮아서 그까짓것 가방 열어주는게 얼마나 할까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영업하던 열쇠 수리공을 불렀다가 호된 바가지를 썼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그밖에도 가격을 물어보지 않고 믿고 맡겼다가 바가지를 썼던 많은 나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른 속도로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국내에서도 현실이 이렇건만, 동남아국가들에서는 외국인은 봉이라는 인식마저 있기 때문에 흥정을 해도 왕창 바가지를 씌울려고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렇게 흥정도 하지 않고 수리를 맡겨버렸으니 시쳇말로 호구되기 딱 좋은 것이 아닌가? 내가 속으로 이렇게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저 묵묵히 부품들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조립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체념을 하고 약간의 바가지는 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시계 값보다도 더 비싼 수리비를 요구하면 어떻게 하지? 만약 그러면 그 시계 너 그냥 가져라 하고 말해버릴까? 아니면 수리비를 좀 깎아달라고 뒤늦은 흥정을 해볼까? 그녀가 시계줄을 조립하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했지만, 아무튼 어떻게 되겠지 하는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난 그녀가 시계줄을 조립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시계줄을 다 조립한 다음, 튼튼하게 조립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본 후,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시계를 건넸다. 나는 시계를 받아들면서 마치 법정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피의자처럼 조심스럽게 수리비가 얼마냐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그녀의 대답은 'It's free.'(무료에요)였다. 그녀의 설명인즉 부품을 잃어버린게 없어서 새 부품이 들어간게 전혀 없고 단순히 조립만 해줬기 때문에 공짜라는 것이다.

 

그래도 부품들을 조립하는데 들인 시간과 수고가 있는데 공짜라니? 내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그것은 공정한 거래가 아니었다. 나는 부속값이 들어간게 없다하더라도 그녀가 수고한 인건비에 대한 댓가는 지불하는게 맞으니 약간의 사례비라도 주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돈 받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게 정직한 사람에게 비록 마음 속으로지만 별의별 경우를 다 상정해 본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난 더 이상 사례비를 받으라고 그녀에게 강권하는 것은 오히려 그녀의 정직함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돈 주는 것은 포기하고 그대신 가방 속에서 작은 선물 한 개를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난 해외 여행를 떠날 때 여행 중에 도움을 받게되는 현지인들에게 작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언제나 약간의 선물들을 미리 준비하고 여행을 하는데, 그 중의 하나를 꺼내서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전한 것이다. 물론 그녀는 이마저도 사양하려했지만, 친절하고 정직한 타이완 사람을 만나게되서 진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고 싶은 작은 선물이니  부담없이 받아도 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의 작은 선물을 받았다.

 

그녀는 내가 타이완에 도착해서 잠시나마 대화를 나눈 첫번째 타이완 사람이었다. 정직을 넘어서 순수하고 강직한 인상을 준 그녀로 인해 내가 갖고 있던 타이완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은 단번에 사라졌다. 오히려 타이완 사람들은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친절하고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그녀는 내 마음속 깊이 각인시켜주었다.

 

그녀를 만난 이후에도, 불과 2박 3일이라는 짧은 체류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타이페이에서 친절하고 정직한 타이완 사람들을 여러명 만나게 되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소개하기로 한다.